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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하늘이 내린 춤꾼 우봉이매방'

  • 관리자
  • 2014-08-18 19:25:08
  • 조회 : 1,786
[이 사람] - 최보식이 만난 사람

하늘이 내린 춤꾼… '전통춤 인생 80년'

이매방



 
춤 속에도 陰陽(음양)이 있어"

 

"애 낳고 나이가 든 욕 알아듣는 제자에게만 욕해
 내 괜히 욕하겠어, 욕 먹을 짓 하니 그러지"
"외길로 가려 하지 않고 제멋대로 샛길로 가서
빨리 이름을 내 돈 벌려고 해… 다들 잔머리만 굴려"


'하늘이 내린 춤꾼' 이매방(李梅芳)은 생물학적으로 영락없는 노인이었다. 보라색 한복 차림으로 그는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연달아 신음 같은 숨소리를 냈다.

―말씀을 나눌 수 있을까요?

"말은 할 수가 있어. 허리가 아파서 걸음은 잘 못 걸어도."

―불편하시면 누워서 해도 됩니다.

"십몇 년 전 위암 수술을 받은 뒤로 이불 깔고 누워 지내지. 함께 어울리던 무용가 중에서 내가 제일 어렸는데 다들 죽었어. 최승희 제자인 김백봉과 나만 살아 있어. 나이 먹으면 가게 마련이야. 옛날처럼 춤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없어."

서울 양재동 그의 자택으로 찾아간 것은 아래의 문화면 기사를 읽은 뒤였다.

〈지게꾼으로 분장한 미수(米壽)의 무용가가 무대 오른편에서 제자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박수가 쏟아졌다. 그가 무대 앞 오케스트라 피트 쪽으로 와 바닥에 앉자 관객들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지난 10일 저녁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 그는 한국 전통 무용의 거목 우봉(宇峰) 이매방이다.

 

▲ 이매방 선생은 “요즘에는 전통춤의 기본도 모르고 관객들이
박수 쳐주면 초랭이 방정을 떤다”고 말했다. 그가 승무를 추는 모습.
/‘우봉 이매방 춤보존회’ 제공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97호 살풀이춤의 예능 보유자인 우봉은 이날 그의 제자들이 마련한 '우봉 이매방 전통춤 공연'의 2막 첫 무대에서 직접 무대에 나왔다(중략).

그는 남도 민요 장단에 맞춰 손을 허공으로 뻗으며 2분 동안 춤사위를 펼쳤다. 이어 펼쳐진 승무(僧舞)에서는 직접 장구 반주를 했고, 커튼콜에선 휠체어를 타고 나와 입 맞추는 포즈를 취했다.〉

거동이 불편해 잘 서 있지도 못하는 87세의 대가(大家)를 무대로 불러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춤꾼의 마지막 열정인지, 혹은 노년의 욕망, 공연기획사의 상업적 목적에 의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령 춤의 열정(熱情)이라 해도 고령인 그에게서 충분한 답변을 들을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전성기 시절 그의 춤추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늦게 달래는 심정으로 찾아갔다.

―이런 몸으로 왜 무대에 섰나요?

"내 이름을 붙여서 하는 제자 공연이니까, 내가 아직 살아 있다고 얼굴을 비쳐줘야지. 그러면 공연하는 제자들이 힘이 생기지. 허리만 안 아팠으면 별 춤을 다 췄을 건데."

―무대에 앉아 팔 동작만 하는 지게 춤을 2분간 췄지요?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면 내 춤도 끝나겠지만. 죽기 전에는 지게를 지고 누워서 추든 앉아서 추든, 내가 몸을 움직거리면 무용 아니여."

이날 인터뷰 방문에 대비해 그는 전날 밤부터 집 안을 청소하고 가구를 옮기게 했다고 한다. 배석한 딸과 제자는 꼭두새벽부터 그의 독촉 전화를 받았다. 그의 딸은 "아버님이 너무 신경 써서 안 주무시고 기다렸다"며 설명했다. 그런 사전 준비로 인해 정작 내가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지친 상태였다.

"인터뷰하기 전에 힘을 다 소모하면 어떡합니까?" 하고 내가 농담하자, 딸이 대신 받았다.

"아버님이 워낙 꼼꼼하시니까요. 편찮아지시면서 많이 순해졌지만 정말 '피곤형'이거든요. 아버님에게는 하나라도 어긋나면 안 돼요. 집 안 장롱 간의 높낮이도 정확히 맞춰야 해요. 공연 때는 너무 완벽주의자여서 춤사위가 0.1㎜ 틀리는 것도 용납을 못 했어요. 성격도 급해요. 제자들이 말귀를 빨리 못 알아들으면 난리가 나요."

얼굴에 약간의 홍조(紅潮)를 띤 채 듣고 있던 그가 말했다.

"난 외길로 춤 하나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니까. 내가 직접 재봉침(재봉틀)으로 장삼이며 저고리, 버선을 다 내 손으로 만들었어. 제자들 무대 의상도 내가 다 지어줬지. 그러니 춤사위가 조금만 틀려도 화가 절로 나지. 딴생각하고 내가 가르쳐준 대로 안 하니까."

―제자들이 많지요?

"엄청나제. 대학교에서 한국무용 가르친다는 교수들은 태반 내게 배웠다고 보면 되지."

―요즘도 제자를 가르칩니까?

"2층 연습실에 올라가 봤어? 교육조교가 가르치고, 나는 앉아서 입으로만 춤을 추지. 가끔 장구로 장단은 쳐주지만."

―제자들이 제대로 추고 있는지 한눈에 보입니까?

"그러제. 전통춤은 한복의 선처럼 곡선(曲線)의 아름다움이지. 묘미는 정중동(靜中動)에 있어. 몸에서 배꼽이 중(中)이고, 밑은 정(靜), 위는 동(動)이지. 이렇게 전통춤을 추는 게 아니라 제멋대로 춤사위를 고치고 집어넣어. 관객들이 재미있다고 박수 치고 웃어 주면 초랭이 방정을 떨어. 양심이 있다면 전통춤을 그렇게 출 수가 없어. 묘한 세상이 돼버렸고 환장하겠어."

―선생님의 승무나 살풀이춤은 여성이 추는 춤으로 여깁니다.

"여성 춤, 남성 춤이 어디 있어. 춤 속에 여성, 남성이 다 들어 있지. 전통춤은 오그리고 펴고 안고 서고 전진하고 후진하지. 이 속에 음양(陰陽)이 있지.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야.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부부 관계도 그렇고…."

슬슬 풀려가나 싶었는데 갑자기 그의 입에서 음담패설과 신체 부위에 대한 욕이 터져 나왔다. 그의 별명이 '욕대장' '따발총'이었고, "이매방 선생은 다 좋은데 욕만 안 하면 나무랄 데가 없다"는 동료들의 회고담이 떠올랐다.


 


 
―선생님의 춤은 섬세하고 고운데, 입담은 안 그렇군요.

"내가 목포 출신이니까. 전라도 사람들은 반가워도 욕이지. 술자리에서 어울리던 친구들이 욕을 잘했어. 옛날에는 내가 술의 왕이었지. 담배도 하루 두 갑씩 피웠고. 암 수술 뒤로는 다 끊었지."

―제자들에게 '이년 저년' 하며 욕을 잘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에게나 안 해. 시집가서 애 낳고 나이가 들어 욕을 알아듣는 제자들에게만 하지. 내가 정신병 걸린 것도 아니고, 괜히 욕을 하겠어. 욕 얻어먹을 짓을 하니까 그렇지."

―무슨 짓을 하길래요?

"내 말대로 해야 춤가락이 좋아지는데, 제멋대로 춤을 섞어. 그러면서 '이매방한테 배웠다'고 해서 자기 격을 올리려고 하니, '저런 쥑일 년. 야 이년아, 내가 춤을 그렇게 가르쳤느냐'고 하지. 어떤 년은 내게 잠깐 배우고 코빼기도 안 비치고는 마치 수년간 배워 후계자인 양 행세해."

―요즘에 이렇게 말하면 큰일 납니다.

"그러제. 세월 많이 변했어. 이제 나도 욕할 기력이 없어. 내 말 듣고 외길로 가려는 년들은 없고, 샛길로 가서 빨리 이름 내 돈 벌려고 해. 다들 잔머리만 굴려. 웃기는 세상이 됐어."

―배운 대로 그대로 출 수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과 창작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삼고무(三鼓舞)·오고무 같은 북춤을 만들어 유행시켰어. 창작은 자기 머리와 노력에서 나오지. 요즘 무용하는 년들은 전통춤의 발동작도 모른 채 쇼 딴따라 발레 현대무용을 섞어서 오두방정을 다 떨어. 장구채를 잡을 줄도 모르는 것들이…. 저렇게 유행 좇아 가다 보니 전통춤은 소외되고 무시당했지. 이런 꼴 안 보려면 내가 빨리 죽어야 한다니까. 정말 징하다고. "

―선생님을 이을 만한 제자는 누가 있나요?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내 춤을 추는 건 우리 집사람이지."

그는 마흔셋이던 1970년 무용가 김명자씨와 결혼했다. 열다섯살 차이다. 김씨는 그에게서 승무와 살풀이춤을 배워 현재 교육조교다. 검무(劒舞)를 추는 외동딸도 그에게서 춤을 배웠다.

―선생님은 목포 권번(券番·일제 강점기 시절 기생들의 조합)에서 춤을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쉰셋, 어머니가 마흔여섯에 나를 낳았어. 내가 10남매 중 막내야. 자식이 많다 보니 나처럼 별 자식이 다 있지. 어머니가 춤 흉내 내는 나를 예뻐했지. 그래서 집 옆 권번에 보내준 거야."

―기생들 틈에서 춤을 배웠군요.

"그러제. 기생들한테 귀염 받았지. 서로 나를 안고 가르쳐주고 했지. 춤 선생은 이대조라는 분이었지. 호남 전통춤에서 최고였어. 같은 성씨라서 나는 이분을 할아버지라고 불렀어. "

 


 
―춤 배우는 남자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지요.

"그때는 남자가 춤을 배우면 정상이라고 안 봤어. 그래도 내가 좋아 미쳐서 췄지. 나중에 아버지가 알고서는 '집안이 망조 들려 무당 새끼 생겼다'며 작대기로 후려 패기도 했지."

―'이매방' 이름만 듣고는 여성인 줄 아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나를 한 번도 못 본 사람들은 착각을 많이 했지. 예명(藝名)인데 십몇 년 전 재판해서 본명으로 만들었어."

―중국 경극(京劇)의 최고 배우 '매란방'에서 따왔다면서요?

"어릴 때 중국에서 그분 공연을 봤어. 춤을 추는 매란방만큼 예쁜 여자가 없어. 동성연애의 왕이지. 그러나 부인과 자식은 있었지."

―선생님도 그렇게 고운 걸요.

"내가 화장을 곱게 해 무대에 서면 여자보다 더 예쁘다고 했어. 열다섯 살에 목포역 공터의 첫 무대에서 추었던 춤이 '승무'였지. 그때 관객들이 '저게 계집애인 줄 알았는데, 아따 예쁘고 춤 잘 춘다'고들 했지."

일제 강점기에 서양의 영향을 받은 '신(新)무용'을 주로 추던 시절, 그는 호남 기방(妓房)의 전통춤을 보여줬다. 그는 요정이나 요릿집에선 춤을 추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샛길로 안 빠지고 외길로 살아온 것이지. 춤추는 것 외에는 한 게 없어. 먹고 입는 거나 자리에 대한 욕심도 없었어."

10년 전 그가 '춤인생 70주년 기념공연'을 했을 때, 고(故) 차범석 선생(극작가)은 이런 축하 글을 썼다.

'당신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지도 모르오. 동트기 전의 새벽길을 혼자서 떠난 나그네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오.'

그는 전통 춤사위를 가장 아름답고 섬세하게 보여준 무용가로 평가된다. 하지만 글은 그의 춤을 그려낼 수 없고, '고운 손끝 맵시' '일자로 종종이 비껴가는 버선코의 걸음걸이'에 머무를 뿐이다.

그는 부축을 받고 간신히 2층 연습실 계단을 올라갔다. 신음 비슷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자리에 앉아 장구채를 잡자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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